2026. 7. 26. 08:10ㆍ카테고리 없음
중요한 자리에서 와인을 대접해야 하는 날이었다.
해외 거래처 임원들을 초청한 만찬 자리였다.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서 준비했고, 분위기도 좋았고, 음식도 준비됐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고 와인을 따려는 순간, 담당 직원이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귀에 대고 말했다.
"과장님, 와인 오프너가 없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멈췄다.
고급 와인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병을 딸 도구가 없었다. 손님들은 대화를 나누며 와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준비란 없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꼭 온다.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해도, 생각지 못한 빈틈이 생긴다. 중요한 행사일수록 그 빈틈이 더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당황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그러면 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와인 오프너 사건은 내게 그걸 가르쳐준 순간이었다.
나는 담당 직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주방에 가서 셰프한테 부탁해봐. 없으면 근처 편의점이나 마트 확인하고."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 사이를 돌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3분쯤 지났을까. 직원이 웃는 얼굴로 주방 쪽에서 걸어왔다. 셰프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와인은 제때 열렸다. 손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위기에서 가장 먼저 할 일
그날 이후 나는 위기 상황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을 의식하게 됐다.
당황하는 것. 이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당황한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당황하면서도 머릿속을 빠르게 돌리는 건 다른 일이다.
내가 훈련처럼 익힌 건 이것이다. 문제가 생기는 순간, 속으로 딱 하나만 묻는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뭔가?"
와인 오프너가 없을 때: 주방에 물어본다, 근처 가게를 찾는다. 이 두 가지가 바로 나왔다. 그걸 동시에 진행했다. 손님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는 자리를 지키면서.
문제를 직면한 사람이 패닉하면 주변 사람 전체가 패닉한다. 반대로 리더가 침착하면 팀 전체가 침착해진다. 와인 오프너 사건은 그것을 몸으로 가르쳐줬다.
준비의 역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준비 방식을 바꿨다.
예전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려 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확인하고, 빠진 게 없으면 안심했다. 하지만 와인 오프너처럼, 체크리스트에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준비의 마지막 단계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만약 지금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해두면, 실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이미 한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준비란 없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미리 마음을 준비하는 건 할 수 있다. 그 마음 준비가 실제 위기에서 침착함을 만든다.
캠핑장에서도 똑같이 겪는다
퇴직하고 캠핑장을 운영하면서도 이런 순간들이 있다.
만원인 주말 오후에 갑자기 전기가 나간 적이 있다. 손님들이 한꺼번에 에어컨을 켜면서 차단기가 내려갔다. 당황할 틈이 없었다. 바로 전기실로 달려가 차단기를 확인했다. 과부하가 원인이었다. 몇 개 구역의 전원을 순차적으로 올리면서 해결했다.
갑자기 예약이 두 팀에 중복된 적도 있다. 손으로 관리하던 시절에 날짜를 잘못 기입한 것이었다. 두 팀 모두 차를 몰고 오는 중이었다. 한 팀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대신 다음 방문 때 할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 팀은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협조해줬다.
문제가 생겼을 때 숨기거나 모른 척하면 더 커진다. 빠르게 인정하고 해결 방향을 먼저 제시하면 의외로 상황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선의와 평가 사이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딜레마도 생긴다.
잘 해주려고 한 일인데 결과가 좋지 않게 됐을 때.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빠진 게 생겼을 때.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
나는 직장에서 이런 기준을 스스로에게 세웠다. 내가 한 행동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자책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찾는다.
와인 오프너를 빠뜨린 담당 직원을 나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 직원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을 것이다. 대신 다음 행사부터 음식 관련 장비 체크리스트에 "개봉 도구"를 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실수를 탓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같은 실수를 막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게 낫다.
인생에서 와인 오프너 같은 순간
살면서 와인 오프너 같은 순간은 수도 없이 온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한 날 가장 황당한 변수가 생긴다.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던 순간에 의외의 해결책이 나타난다. 그 반복이 인생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건 두렵지 않다는 게 아니다. 두렵고 당황스러워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는다는 뜻이다.
그 훈련이 직장에서 쌓였고, 캠핑장에서 계속되고 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도 작동한다. ChatGPT가 처음엔 낯설어도 일단 입력창에 뭔가 쳐보는 것. SUNO가 처음엔 어색해도 일단 가사를 넣어보는 것. 그것도 같은 근육이다.
완벽한 준비는 없다. 완벽한 대처도 없다.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태도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와인 오프너 사건이 그걸 가르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