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없앤 날, 가족 대화가 시작됐다 — 우리 집 거실에 책꽂이를 놓은 이유

2026. 7. 26. 08:2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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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TV를 없앤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이 거실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TV 앞에 앉게 됐다.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아들은 예능을 보고, 나는 뉴스를 보고 싶어 했다. 채널 하나를 놓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각자 따로 있었다.

어느 저녁 밥을 먹으면서 아들에게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하고 물었다. 아들은 "그냥요"라고 했다. 그게 다였다. 더 묻고 싶었지만 TV에서 뭔가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고,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TV를 없애기로 한 날

아내에게 말했다. "TV를 없애면 어떨까?"

아내의 첫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갑자기 왜요? 드라마는 어떻게 봐요?"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뉴스와 스포츠 중계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요즘 우리 가족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대화가 없다는 것.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 TV가 있는 한 그 시간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것.

아내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한번 해봐요."

다음 날 TV를 창고로 옮겼다. 그 자리에 작은 책꽂이를 놓았다. 평소에 읽고 싶었지만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을 꺼내 꽂았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처음 일주일

솔직히 처음 일주일은 어색했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으면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TV를 켜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그게 없으니 거실이 낯설었다.

며칠이 지나고 아내가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도 옆에서 신문을 펼쳤다. 아들은 처음엔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들이 방에서 나와 책꽂이를 들여다봤다. 한참 보더니 책 한 권을 꺼내서 소파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앉아서 각자 책을 읽었다.

그 고요한 시간이 이상하게 좋았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변화는 서서히 왔다.

밥을 먹으면서 대화가 길어졌다. TV가 없으니 밥상에서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게 됐다. 처음엔 짧았다. "오늘 뭐 했어?" "그냥요." 그게 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오늘 친구랑 싸웠어요."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조언을 하려고 했더니 아내가 살짝 내 팔을 건드렸다. 그냥 듣기만 하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들었다.

아들이 한참 이야기하고 나서 말했다. "말하고 나니까 좀 나아졌어요."

그날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충분했다.


TV가 없어지고 생긴 것들

TV를 없애고 나서 달라진 것들이 있었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됐다. 전에는 책을 사도 첫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거실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TV를 켰으니까. 이제 거실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책을 들었다. 그게 습관이 됐다.

잠이 더 잘 왔다. 뉴스나 자극적인 영상을 보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잠자리에 들게 됐는데, 그게 없어지니 잠드는 게 수월해졌다.

무엇보다 아들을 더 많이 알게 됐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좋은지. 그전엔 몰랐던 것들이 식탁 위 대화에서 하나씩 나왔다.


지금도 TV가 없는 이유

캠핑장을 운영하는 지금도 거실에 TV가 없다.

가끔 손님들이 놀란다. "TV가 없어요?" "." "불편하지 않으세요?" "전혀요."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더 편하다. 보고 싶은 영상이 있으면 유튜브로 보면 된다. 뉴스는 스마트폰으로 본다. 필요한 건 다 볼 수 있는데, TV처럼 자동으로 흘러나오면서 시간을 가져가지 않는다.

디지털 도구가 넘쳐나는 시대에, 오히려 중요한 건 무엇을 끌 것인지를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다 연결할 수 있지만, 진짜 연결이 필요한 곳이 어딘지를 아는 것. 그게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인 것 같다.


거실 책꽂이가 가르쳐준 것

거실 한가운데 놓인 책꽂이는 지금도 있다.

아들이 중국으로 떠나면서 읽던 책들을 꽂아두고 갔다. 그 책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 가끔 그 책들을 꺼내 읽으면, 아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읽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그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책꽂이는 그냥 책을 보관하는 가구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아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는지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준 공간이었다.

TV 하나를 없앴을 뿐인데, 그 자리에 그보다 훨씬 큰 것들이 들어왔다.

스크린을 끄면 사람이 보인다.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단순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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