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7. 10:10ㆍ카테고리 없음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 마더 테레사
어릴 적 골목의 기억
어릴 때 살던 동네엔 이상한 풍경이 있었다. 이삿짐 트럭이 골목을 막으면 동네 어른들이 하나둘 나와 구경을 했고, 막걸리 한 잔씩 나눠 마시며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다. 멀리 간다고 하면 눈물을 훔치는 이웃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좋았던 것도, 깊이 친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멀어진다는 사실이 슬펐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시대가 됐다.
이웃이 사라진 사회
핵가족화와 아파트 문화가 퍼지면서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눈을 피하고, 층간소음 문제로 분쟁이 생겨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옆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누군가 홀로 세상을 떠나도 며칠이 지나서야 발견되는 일이 생긴다.
일본에서는 이런 죽음을 무연사(無緣死) 혹은 고독사(孤獨死) 라고 부른다. 1년에 수만 명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이제 우리나라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천 년 전, 길 위의 선택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강도를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지나가던 제사장은 바쁜 척 피해 갔고, 레위 사람도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상처를 싸매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돈까지 내주며 "부족하면 돌아올 때 더 드리겠다"고 했다.
누가 '이웃'인가.
화려한 직함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걸음을 멈춘 사람이었다.
38명의 목격자가 있었지만
1964년 뉴욕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있다. 키티 제노베스라는 여성이 새벽에 귀가하다 강도의 칼에 찔렸다. 공격은 30분 이상 이어졌다. 주변 아파트에서 38명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 라고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 그 38명 중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무관심'이 38겹으로 쌓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쓰러졌을 때, 지나가는 군중 속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전문가들은 말한다. 불특정 군중에게 외치지 말고, 한 사람을 콕 집어 요청하라고. "파란 재킷 입으신 분, 저 좀 도와주세요!" 라고.
무관심의 고리는, 한 사람의 시선으로 끊을 수 있다.
조금만 더 살펴봐도 되는데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한탄하면서도, 사실 우리도 하루에 몇 번씩 '모른 척'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챙기라는 말이 아니다. 거창한 친절이나 희생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조금만 더 살펴보는 것. 눈길을 한 번 더 주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인사하는 것. 오래 못 본 친구에게 연락 한 통 하는 것. 혼자 사는 이웃집 노인에게 "잘 지내셨어요?" 한마디 건네는 것.
이 작은 관심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면, 사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따뜻해진다.
마치며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다.
미움은 적어도 상대를 '본다'. 관심을 준다. 에너지를 쓴다.
진짜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이번 주, 옆집 이웃과 차 한 잔 나눠보는 건 어떨까. 작은 시작이 누군가에겐 큰 온기가 될 수 있다.
태그: 사랑의반대말, 무관심, 고독사, 선한사마리아인, 방관자효과, 감성에세이, 이웃, 공동체, 초고령사회, 삶의이야기